자동차 살 때 개인정보 줄줄 샌다
[중앙일보 양선희.한애란] 자동차를 사면 그 순간 당신의 개인정보는 더 이상 당신만의 것이 아니다. 새 차에 정신이 팔려 있는 사이 자신도 모르게 주민등록번호·휴대전화·e-메일 등 소중한 개인정보를 다른 회사에 넘겨도 좋다는 항목 밑에 서명을 하기 때문이다. 꼼꼼한 소비자의 경우 그런 문구를 확인해도 서명을 거부하기 힘들다. 그러면 차를 사기 어렵기 때문이다.
자영업을 하는 김모(46)씨는 최근 현대차를 구입했다. 집에 돌아와 매매계약서를 다시 들여다보고 깜짝 놀랐다. 영업사원이 시키는 대로 계약서에 모두 서명했는데, 이제 보니 ‘신용정보 제공 및 활용’에도 동의했던 것이다. 내용은 자동차 회사가 고객의 주민등록번호·연락처 등 각종 정보를 백화정신용카드회사·정유사·택배회사 등에 마케팅 자료로 넘기는 데 동의한다는 것이었다.
김씨는 바로 영업사원에게 전화해 항의했다. 그러자 그는 “계약서의 서명란에 모두 서명을 해야 계약이 완료되는 것으로 본다”며 “서명을 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김씨는 “일반 소비재 중 개인정보를 기록한 계약서를 쓰고 사는 물건은 자동차가 거의 유일한데, 차 회사들이 이렇게 확보한 개인정보를 다른 기업의 마케팅을 위해 제공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며 분통을 터뜨렸다.
본지 확인 결과 기아·GM대우·르노삼성·쌍용 등 국내 자동차 회사들은 모두 현대차와 마찬가지였다. SK네트웍스가 딜러인 재규어·랜드로버 대치점은 고객 정보를 타미휠피거·DKNY 등 유명 패션회사와 와인판매회사, 부동산 관련 업체에까지 제공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수입차 업체는 매장마다 계약서가 다른 경우가 많다. 한 수입차 업계 관계자는 “수입차는 딜러들을 통해 판매하기 때문에 같은 브랜드라 하더라도 딜러가 어디냐에 따라 고객정보를 제공하는 곳도 있고, 안 하는 곳도 있다”고 말했다.
자동차 회사들은 “소비자의 동의를 받아 신용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므로 불법은 아니다”는 입장이다. 현대차 관계자는 “향후 필요한 마케팅에 대비해 동의서를 받아놓은 것이지 실제로 모든 정보를 제휴사에 넘기는 것은 아니다”며 “제휴사에서 요청을 받아 법무팀이 문제가 없다고 판단한 경우에만 고객정보를 제공한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계약서를 작성할 때 영업사원들이 고객에게 이 항목에 대한 설명을 제대로 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으로 나타났다. 또 정보 제공 범위가 너무 넓어 불공정 소지가 많다는 게 법률 전문가들의 해석이다. 기업들은 서명을 받는 법적 근거로 ‘신용정보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과 ‘정보통신망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을 계약서에 명기하고 있다. 그러나 자동차 회사는 일반 소비재 업체여서 ‘정보통신망…’ 법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이창범 한국정보보호진흥원 법제분석팀장은 “기업이 개인정보를 마케팅에 활용하려면 고객의 자발적인 동의가 있어야 하고, 자신의 정보가 제공되는 업체를 고객들이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며 “지금 사용 중인 자동차 회사들의 계약서는 너무 포괄적이어서 약관법 위반과 사생활 침해 요소가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